영화 ‘서울의 봄’ 때문에 40여년 만에 새삼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는 ‘전두광’의 죄목은 내란음모와 군사반란이다. ‘전두광’이 1979년 12월 일으킨 하극상 사태를 당시 언론은 감히 ‘군사반란’, ‘쿠데타’로 쓰지 못했다. 다음해 5월 ‘전두광’이 광주에서 벌인 학살극을 언론은 ‘광주사태’라고 불렀다. ‘광주에서 폭도들이 일으킨 사태’라는 최악의 프레임이다. ‘광주사태’라는 이름이 얼마나 진실을 왜곡하는 악의적 명명(命名)이었는지, 80년대 대학가에서는 이 이름을 절대 부르지 못하게 했다. 훗날 민주정부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공식 명명했다.
역사적으로 집권세력이나 지배세력은 사건·사고의 이름을 자기에게 유리한 입장에서 지어 부르고 언론을 통해 유통시킨다. 이름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에 따라 사건·사고의 본질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감출 것이 많았던 과거 독재정권,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이런 일이 많았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다음에도 이런 사례가 많다. 출범 첫해 서울 이태원에서 150명이 넘는 사람이 압사당하는 사고가 터졌는데, 정부는 ‘이태원 참사’ 대신 ‘이태원 사고’, ‘참사 희생자’ 대신 ‘사고 사망자’라고 부르도록 했다. 일부 친정부 언론은 ‘핼러윈 참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국가의 책임이 담긴 ‘사회적 참사’라는 이미지를 덮고 단순 사고로, 또는 ‘서양 귀신축제’인 핼러윈 파티에 놀러갔다가 죽은 단순 사망자로 인식되길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일본이 핵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겠다고 하자 정부와 어용언론들이 이를 ‘핵 처리수’로 바꿔 불렀다. 방사성 물질 처리시설인 ‘알프스(ALPS)’를 거친 물이기 때문에 ‘처리수’라고 불러야 한다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공격할 때 자주 쓰인 프레임이 ‘사법리스크’인데 그 리스크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대장동 비리’ 연루 의혹이다. 대장동 개발 사업으로 엄청난 이익을 챙기는데 참여했거나 묵인했다는 의혹이지만, 실제 큰 돈을 챙긴 것은 알고 보니 대부분 법조인들이었다. 그래서 ‘대장동 법조인 비리 의혹’이거나 얼마전 통과된 특별검사법의 명칭처럼 ‘50억 클럽 비리 의혹’이 정확한 이름이다. 또 대장동 개발 사업을 위해 누군가 저축은행에서 거액의 대출을 일으켰는데 이를 수사하던 검사가 부실대출 혐의를 무마해줬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 검사의 이름을 따서 이는 ‘윤석열 검사 부산저축은행 부실대출 수사무마 의혹’이라고 불러야하지만 엉뚱하게도 거의 모든 언론이 이런 의혹을 이야기한 두 사람의 이름을 붙여 ‘신학림-김만배 녹취록 사건’으로 부르고 있다. 김건희 씨가 주가 조작에 직접 참여해 20억원 넘는 이익을 거둔 정황이 뚜렷한 금융범죄 사건은 ‘김건희 주가조작 사건’이 아니라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으로 불린다. 김건희 씨가 명품선물을 받고 국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은 일부 언론이 엉뚱하게도 ‘김건희 몰카 사건’이라고 부른다.
유력 대선주자였고 차기대선에서도 유력 후보인 제1야당 대표가 백주대낮에 흉기에 목을 찔려 쓰러졌다. 정치테러다. 경찰과 언론은 ‘습격’ ‘피습’이라고 명명했다. ‘습격’은 ‘예고 없이 가하는 공격’이라는 뜻으로 ‘공격이 갑작스럽다’는 의미가 강할 뿐이다. 정치·사회적 의미가 빠진 개인의 단순 범행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위한 작명이다. ‘정치테러’는 단순 공격을 넘어 정치적 목적과 신념을 갖고 집단적 혐오·증오를 동기로 살인·파괴를 행하는 반사회적 범죄행위다. 사건 발생 직후 정부 대테러센터가 사태파악을 벌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습격’으로 규정한 경찰과 언론은 ‘습격범’ 개인의 단순 혐오범죄로 사건을 조용히 마무리하고 있다.
김성재 전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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