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차종관 기자] "나는 10월에 태어났고 누군가는 10월에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죽음은 평등하다는 말을 믿어보려 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라도 그저 참인 것이 있다면 숨의 처음보다는 마지막이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또 한 번 이 믿음은 기각됐다. 처음은 아니었지만, 정확히 동일한 처음의 감각으로 우리 앞에 왔다. 분명 어떤 죽음들은 끝내 죽음을 맞지 못한다. 그리고 평등한 죽음은 평등한 삶이 아니고서야 결단코 오지 않음을 산 자들의 몸에 각인한다. 그래서 그 흔적은 언제나 애도와 투쟁의 풍경으로 죽음의 자리에 남는다. 적어도 죽음은 평등하다는 애잔한 믿음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부디, 그날 밤을 기억하는 모두의 오늘이 안녕하기를 바랍니다."(홍진훤 사진작가)
이태원참사 2주기를 맞아 서울 용산구 이태원 인근에서 희생자를 추모하고 참사의 아픔을 나누는 문화제가 열렸습니다. 10·29 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와 유가족협의회가 28일 오전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에서 빌보드(야외 게시물) 개막식을 개최한 겁니다.
28일 오전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인근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에서 빌보드 개막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는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유가족협의회. 희생자 이주영씨의 아버지인 이정민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참사 2주기 빌보드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과 올해의 독일 사진집상 등을 수상한 노순택 사진작가, 용산화재참사·세월호참사 등을 기록한 홍진훤 사진작가, 노동자들의 일상을 촬영한 윤성희 사진작가 등이 참여했습니다.
홍 작가는 '일본 효고현 아카시시 JR 고베선 아사기리역 불꽃축제 압사사고 현장'이라는 작품을 게시했습니다. 아카시시 유가족들은 이태원참사 1주기 때 한국에 와서 이태원참사 유가족들을 위로한 바 있습니다. 홍 작가가 이태원참사 빌보드에 아카시시 사고에 관한 작품을 게시한 건 두 나라의 유가족들이 서로 연대하는 의미를 부각한 걸로 풀이됩니다.
특히 홍 작가는 작품 설명에서 참사로 인해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희생자의 비극적 죽음은 결코 슬프거나 비극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걸 강조했습니다. 어떤 죽음들은 산 자들에게 애도와 투쟁을 남긴다는 의미로도 읽힙니다. 이태원참사 2주기가 되도록 유가족들이 진상을 촉구하는 모습을 비유한 겁니다.
'10.29 기억과 안전의 길' 미술을 맡은 권은비 작가가 빌보드에 띄워진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노 작가는 '참사 100일 되던 날 남해바닷가에 뜬 대보름달'이라는 작품을 가지고 왔습니다. 참상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 달의 이면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윤 작가는 참사 피해자들을 생각하며 안동의 불꽃 축제를 촬영했습니다.
특히 홍 작가의 빌보드엔 '부디, 그날 밤을 기억하는 모두의 오늘이 안녕하기를 바랍니다'라는 문장은 14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14개국은 희생자 159명 중 외국인(26명)의 국적을 의미합니다.
이태원 참사 유족이 빌보드에 적힌 희생자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이태원참사 유가족들은 이날 빌보드 개막식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앞으로 시민들이 사진 작품을 보면서 참사를 잊지 않길 바란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이정민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지금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이 골목에 휘몰아쳤던 고통과 아우성이 아직 우리 귀에 맴돌고 있다"며 "억울하게 희생된 영혼을 애도하며,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고 기억하는 소중한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시민대책회의 공동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자캐오 신부는 "여기 설치된 작품들은 이곳을 오가는 이들에게 질문과 위로를 주며 다양한 방식으로 말을 거는 연결고리가 됐다. 2주기를 맞은 이 길과 이 자리를 지키는 여러 상징물들은 중요하다"며 "앞으로도 우리 마음에 영원히 지지 않는 159개의 별을 만나는 자리가 될 것이고, 참사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과 약속의 길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태원 참사 현장에 희생자의 영정과 꽃, 과자, 술이 올라와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빌보드를 포함해 '10.29 기억과 안전의 길' 미술을 맡은 권은비 작가는 "세계에, 전국 곳곳에 이태원참사 피해자들이 흩어져 있고 가슴 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기억과 안전의 길은 아직도 임시 추모시설로 남아 있는데, 진실이 밝혀지면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된 할 수 있는 길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강선이씨(희생자 이상은씨의 어머니)는 <뉴스토마토>와 만나 "희생자들의 이름을 공개할 수 있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며 "진상이 규명되더라도 끝까지 생명안전 사회를 건설하는 데 유가족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한다. 시민들도 잊지 않고 참사를 기억해 달라"고 전했습니다. 이어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 문화예술계에서 작품 활동을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라고도 했습니다.
호주인 희생자 그레이스 라쉐드씨의 어머니 조안 라쉐드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날 행사엔 호주인 희생자 그레이스 라쉐드씨의 어머니 조안 라쉐드씨와 그의 여동생, 사촌언니도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홍 작가의 작품에 한국어와 영어로 새겨져 있는 딸의 이름을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편, 10·29 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와 유가족협의회는 29일 참사 2주기를 앞두고 21일부터 29일을 집중추모 주간으로 정했습니다. 이 기간에 기자간담회와 정책포럼, 콘서트, 학술대회, 시민추모대회 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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